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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빗의 생각모음

하늘의 문을 여소서!!

by 데이빗_ 2016. 9.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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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문을 여소서!

내가 중고등학교 시절에 다녔던 교회는 작은 개척교회였다. 중고등부 전체를 다 합쳐도 20명이 채 되지 않는, 작고 가족적인 분위기의 교회였다. 중고등학교 시절 교회에서 있었던 추억을 이야기하자면 끝도 없이 많이 있겠지만, 무엇보다 기억에 남는 것은 여름과 겨울에 갔던 수련회의 기억이었다.

요즘은 많은 교회에서 중고등부 수련회 프로그램을 외부 사역단체 집회에 참석하는 것으로 대체하는 것 같다. 아마 그 때에도 그런 프로그램들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 교회는 매번 수련회 프로그램을 교회 내에서 직접 기획해서 실행하는, 이른바 자체 수련회로 진행했다. 여름 방학 시작되면 한 달 동안 선생님과 중고등부 임원들이 모여서 일정과 장소를 정하고 프로그램을 짜면서 분주했다. 수련회 핸드북도 직접 만들어서 제본했다. 일주일 전부터 준비기도회를 가지면서 이미 마음은 수련회장에 가 있었던 기억이 난다. 중고등부 수련회였지만, 아이들 식사와 간식을 챙겨 주실 헌신적인 집사님, 권사님들, 그리고 마땅히 여름 휴가를 가지 않으신 장년부 어른들도 동행해서 함께 즐기고 은혜를 나누었던 기억이 있다.

대개 가장 재미있거나, 가장 고되었던 프로그램이 기억에 남기 마련이다. 해마다 힘든 프로그램 중 1등으로 꼽히는 것은 천로역정이었다. 뙤약볕에 조를 짜서 코스와 코스를 이동하면서 말씀을 외우고 미션을 수행하고, 어떤 코스는 지독하게 굴리기도(?) 하면서, 험난한 세상을 헤치고 나가는 크리스찬의 삶을 묘사한 프로그램이었다. 그렇게 땀을 뻘뻘 흘리고 최종 코스를 통과해서 먹는 시원한 수박의 맛도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천로역정과 관련해서 잊을 수 없는 배신의 기억이 있다. 아마 매번 똑같은 방식으로 프로그램을 짜자니 선생님들도 좀 식상하게 느끼셨던 모양이다. 잠시 쉬는 시간 비슷하게 음료수와 과일을 차려 놓은 코스가 있었는데, 이게 웬일인가 하면서도 맛있게 먹고 더위를 식히고 있었더니 “여기는 유혹의 방이었다!!” 하면서 뺑뺑이 코스로 우리를 되돌려 보냈다. 그 수박이 선악과였을 줄이야.!! 그 때 얼마나 혼비백산했던지, 지금도 그 생각만 하면 모골이 송연하다. 우리는 착한 학생이었으므로, 코스 이동하면서 교차하던 다른 팀에게 유혹의 방에서 절대 과일을 먹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지금 같았으면 혼자 죽을 수 없다고(?) 비밀을 엄수했으리라. 나중에 보니 그 팀도 뺑뺑이 코스로 왔기에, 어떻게 된 일이냐 물어봤더니, 과일 먹으라는 지시사항에 불이행했다고 보냈다나. 아마 빠져나갈 수 없는 덫이었던 듯.

그렇게 눈물과 애환이 서린(?) 프로그램이 기억에 남는 법인데, 하나 더 꼽자면 저녁 집회가 빠질 수 없었다. 매번 저녁 집회는 7시부터 11시 정도까지 진행했는데, 마지막 부분은 통성기도 시간이었다. 누구는 죄를 회개하면서, 누구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누군가는 하나님의 위로를 받으면서 많이도 울고, 카타르시스도 많이 느꼈던 것 같다. 일부 친구들은 방언의 은사도 받았다. 나는 분위기에 쉽게 취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는지, 그다지 눈물도 나지 않았고, 방언이 터진다든지 환상이 보인다든지 하는 초자연적인 은사는 당연히 그저 남의 이야기일 뿐이었다.

명색이 중고등부 회장인데, 눈물이 나지 않는다니! 그것은 상당한 고민거리였고 스트레스의 원인이었다. 슬픈 생각을 해 보기도 하고, 내가 저지른 죄들을 떠올려보기도 했다. 나는 그렇게 문제 학생이 아니었으므로 부모님 속을 썩인 적도 별로 없었기 때문에 눈물을 흘리며 회개할 만한 소스를 찾기란 참 힘든 일이었다. 보통 3박 4일의 일정에서 이틀째 밤까지 눈물이 나지 않으면 수련회 기간을 헛보낸 걸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이틀째 밤에 사활을 걸고, 목소리를 최대한 높이고 손을 최대한 들면서 은혜 내려 주시기를 간구했던 기억이 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별 고민을 다 했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아마 나만의 고민은 아니었던 것 같다. 훗날 다른 교회에서 청소년부 교사가 되었을 때 수련회를 다녀와서 “저는 하나님이 만나주시지 않은 것 같아요” 라고 심각하게 말하는 아이들이 있었는데, 아마 비슷한 고민을 한 것이 아니었나 생각이 든다. 남들은 다 감정이 북받쳐 우는데, 누군은 환상도 보고 예언도 하고 방언도 하는데, 자기만 무미건조하다면 그 또한 얼마나 스트레스일 것인가.

은혜를 받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오늘 찬양 은혜받았습니다”, “오늘 설교 은혜받았습니다”. 아마도 “찬양에 감동받았습니다”, “설교에 깨달음이 있었습니다”를 통상 그렇게 표현하는 것이리라. 그래도,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 내 행위와 관계없이, 내 눈물과 관계없이, 내 열심과 관계없이 나에게 일방적으로 쏟아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믿고 있었다면, “은혜받지 못해서” 그렇게 스트레스를 받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수련회장에서 눈물 흘리지 못한, 소위 “만나주시지 않은 아이들”에게 되물어 보았다.

“너는 은혜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니? 눈물을 흘리면 은혜 받은 것이고, 눈물이 안 나오면 은혜를 못 받은 것일까? 방언이 터진 아이들은 하나님이 만나 주신 것이고, 한 마디 기도도 못 하고 오면 하나님이 안 만나 주신 것일까? 너보다 더 많이 울고 더 많이 ‘은혜받은’그 친구가 하나님 앞에서 너보다 신앙이 올바르다고 생각하니?” 이 무슨 생뚱맞은 소린가 하면서 나를 쳐다보던 아이들의 표정이란.

그 아이가 알아야 했던 것처럼, 나 또한 그 때 알았어야 했다. 땅을 치면서 눈물콧물 흘리면서 기도하고 방언하는 친구들을 보면서 소위 “영적 열등감”에 사로잡힐 때 하나님께서 이미 나를 귀하게 보고 계셨다는 것을. 왜 나는 만나주지 않으시냐고 애원하면서 울 때 하나님께서 바로 내 옆에서 내 손을 잡고 계셨다는 것을. 왜 나는 은혜받지 못하는 것일까 자책하면서 어떻게든 울 거리를 찾으려 애를 쓸 때, 하나님께서는 거절할 수 없는 강물과 같은 은혜를 나에게 붓고 계셨다는 것을. 은혜 받으려고 울려고 애쓰고 스트레스 받는 대신, 내가 이미 은혜 가운데 있다는 것을 믿으며 감사해야 했다. 목소리 터뜨려 가며 애쓰는 대신에, 목소리 순서대로 만나 주시는 게 아님을 알았어야 했다.

“하늘의 문을 여소서”라는 찬양이 있다. 첫 소절의 가사를 조금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하늘의 문을 여소서, 이곳을 주목하소서, 주를 향한 노래가 꺼지지 않으니 하늘을 열고 보소서” 꽤 서정적인 도입부와 간절한 가사가, 그리고 폭발적인 클라이막스의 정서가 잘 맞물려 많은 청년들과 청소년들의 영적 감수성을 자극하는 찬양이다.. 아아, 이 찬양이 내가 중고등학생일 때 나왔더라면, 눈물이 좀 더 쉽게 날 수 있었을 것을!!

이 곡의 작사/작곡자 분의 깊은 영성과 깨달음에 내가 감히 범접할 수준은 아니겠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서 마음이 편치 않은 것만은 어쩔 수 없다. 하늘의 문을 열어 달라고 구하는 것은, 오늘날 하늘의 문이 닫혀 있어서일까? 우리를 주목해 달라고 간구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외면하고 계셔서일까?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대신해서 죽으신 그 순간 활짝 열린 하늘의 문이 2000년동안 단 한 번도 닫히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난 후로는, 하늘의 문을 열어 달라고 기도한 적이 없다. 하나님께서 저 멀리 어딘가 계신게 아니라 바로 내 안에 지금 이 순간 계시다는 것을 깨달은 뒤로는, 내 마음에 임재해 달라고 기도한 적이 없다. 내가 눈물을 많이 흘려서가 아니라 눈물이 없음에도 나를 만나 주고 계신다는 것을, 내가 죄를 회개해서가 아니라 아직도 회개못한 죄가 많음에도 은혜 베풀고 계시다는 것을, 목소리 크게 외쳐 기도해서가 아니라 목소리 크게 외칠 힘조차 없음에도 나에게 귀 기울여 계신다는 것을 알고 난 이후로는, 더 이상 그렇게 스트레스 받을 이유가 없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던가. 기독교는 “지성해도 절대 감천할 수 없다”는 명제 위에 세워졌다. 내가 구원받은 것이 나의 행위 때문이 아니라면, 나에게 은혜 주시는 것도 내 눈물 때문이 아니다. 내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나를 구원하셨듯, 내가 하늘의 문을 열어 달라고 간구하기 이전부터 하늘의 문은 열려 있었다. 그저 내가 마음의 문을 닫고 있었을 뿐. 만나 달라고 간구하기 이전부터 하나님께서는 나를 만나고 계셨다. 그저 내가 하나님을 외면했을 뿐. “성령의 단 비를 부어” 달라고 간구하기 이전부터 은혜의 단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그저 내가 우산을 쓰고 있었을 뿐. 이미 와 계신 하나님께 만나 달라고, 은혜 달라고 목소리 높이며 떼를 썼던 청소년기의 나는, 대체 누구에게 기도하고 있었던 것일까.

세상에서 수없이 비교당하고, 평가당하는 아이들이다. 학교에서도 그저 평범한 아이들이었던 그 “은혜 못 받은 아이들”이 교회에서조차 “믿음 좋은 아이들”에게 느끼는 비교 의식은 얼마나 힘든 것이었을까. 지금은 사정상 잠시 쉬고 있지만 다시 자라나는 아이들을 맡게 된다면, 꼭 알려주고 싶다. 이미 하늘의 문이 열려 있음을. 목소리 크지 않아도, 기도할 때 눈물 나지 않아도, 그저 무미건조하고 싱숭생숭해도, 하나님께서는 그 아이에게 하늘의 문을 활짝 열고 계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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