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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빗의 독서노트

독서후기 (2017-6) : 은혜와 믿음의 균형 안에 사는 삶

by 데이빗_ 2017. 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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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부터 아주 율법적인 신앙생활을 해 왔다. 내가 어릴 때 다니던 교회에서는, 주일예배를 빠진다거나, 십일조를 “떼어 먹는”다거나, 술을 마신다거나 하는 행위는 중범죄로 간주되었다. 모든 공예배에 참석하는 것이 기본이고, 성경은 매일같이 10장 이상씩 읽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을 설득시키고 감동시켜야 하나님께서 움직이셔서 복을 주신다고 믿었기 때문에.

실제로 나는 그렇게 배웠다. 우리의 열심으로 하나님을 움직여야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하신다고 배웠다. 열심이 따르지 않으면 간절함이 없는 것으로 간주되어 하나님께 복을 받을 수 없다는 가르침을 들으며 살았다. 나만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한국의 기독교 문화가 전반적으로 그런 식이다. 목소리 높여 부르짖어야 하나님께서 응답하신다고 믿는다. “하늘의 문을 여소서”라고 기도해야 하나님께서 그제서야 하늘의 문을 여시고 우리에게 응답하신다고 믿는다. 우리의 간절함과 열심이 하나님께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움직이지 않고 계신다고 믿는다. 강청기도, 보좌를 흔드는 기도, 별의 별 기법의 기도들이 유행처럼 퍼져 있는 실태이다.

그게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열정과 열심에 감동해서 움직이시는 분이 아니다. 우리가 기도하기 전까지는 하늘의 문을 닫으셨다가, 기도가 어느 분량에 차면 그제서야 만족하시고 움직이시는 분이 아니다. “그 정도 가지고는 어림없다. 더 열심히 해야지, 그래가지고서야 내 응답을 어디 받을 수야 있겠니?”라고 말씀하시는 분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인색한 분으로 알아 왔다. 엘리야가 바알 숭배자들을 조롱하며 썼던 말마따나 하나님께서 “묵상하고 계시거나, 잠깐 나가셨거나, 잠이 들어서 깨워야 할 것이거나 (열왕기상 18:27)” 하신 것으로 착각한 것이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시다. 후한 분이시다. 우리의 기도 분량이 차지 않았다고 손을 움키고 계신 분이 아니시다. 그런 논리대로라면, 응답을 받으면 “기도 분량이 차서”인가? 우리가 응답을 받았다면, 응답받을 만한 자격에 도달했기 때문에 받은 것인가? 절대 아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이단 사상이 교계에 퍼져 있다. 인간의 지성으로는 절대 감천할 수 없다는 것이 기독교의 기본된 토대이다. 구원이 일방적인 은혜에 의한 것이듯, 구원에 속한 이 땅의 풍부와 풍요, 그리고 모든 영적인 복과 건강의 복 역시도 일방적인 은혜에 의한 것이다. 구원이 우리에게 임한 순간, 부수적인 복과 은총 역시 우리 삶에 임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미 주셨다. 이미 우리에게 임한 것이다. 이것을 믿는 데서 우리의 형통과 평안이 시작된다.

이 사실을 알고 나서 내 율법적인 신앙생활은 혼란을 맞았다. 아니, 그러면 내가 지금까지 해 온 이 모든 행위들이 다 필요 없다는 뜻인가? 이것으로 하나님을 움직일 수 없다고? 그러면 내가 성경을 읽고, 주일성수를 하고, 헌금을 꼬박꼬박 해 온 것들은 다 무엇을 위해서였던가? 아니, 지나간 것은 다 그렇게 묻어 버리자. 당장 오늘, 나는 왜 교회에 가야 하며, 왜 헌금을 해야 하며, 왜 기도해야 하는가? 하나님께서 이미 다 주셨다면 나는 오늘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런 극심한 혼란 속에서 몇 달, 아니, 몇 년을 보낸 것 같다.

성경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고 한다. 어쩌면 내 신앙의 경험은 좌측 끝에서 우측 끝으로 순식간에 넘어온 경험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행위주의, 율법주의적 신앙생활 때는 내 의를 가지고 하나님을 감동시켜 보려는 사악한 신앙생활을 했었고, “일방적 주권과 은혜”에 쏠려 있을 때에는 “내가 할 일이 아무 것도 없다”는 쪽의 극단적 방종으로 흘렀다. 이 두 가지 관점이 적절히 균형을 맞춘다면 더 유익한 신앙생활이 되었겠지만, 안타깝게도 나에겐 그런 균형추가 없었다.

이 책은 “하나님의 일방적 은혜”에 대한 “인간의 의지적 반응”이라는 관점을 가지고 균형추를 맞추라고 제안한다. 전통적인 칼뱅파 교리를 왜곡한 “오직 은혜만으로 구원받았다”라는 명제는 틀린 것이다. 은혜로 구원받은 것이지만, “은혜만으로”구원받았다고 믿는 것은 잘못이다. 그렇게 믿다 보니 지옥갈 사람도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셨다는 이단 사상이 나오는 것이다. 거기서 논리적 맹점이 생기니까, “우리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주권과 섭리다”라고 뭉개 버리는 무식한 교사들이 얼마나 많은가?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지만, 인간의 반응에 따라 하나님의 뜻이 좌절되는 경우가 엄연히 있는 것이다.

“은혜에 의해 모든 것이 공급되었지만, 그것을 받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라는 관점을 취하면, 지옥가는 사람을 하나님이 미리 정했다는 개그도, 혹은 “우리의 열심으로 하나님을 설득해서 응답을 받아야 한다”는 개그도 피할 수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공급하신 것들을 받아 누리기 위한 믿음이다. 그 은혜를 깊이 깨닫기 위한 우리의 의지와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교회를 나가는 것은 훌륭한 방법이지만, 그 하나님을 감동시켜 드리기 위해서가 아니다. 내 마음의 눈을 밝히고 진리를 발견해서 삶에 적용하고 누리기 위해서이다. 성경을 마땅히 읽어야 하지만, 하나님을 설득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것으로 심령을 갈고 닦아 믿음을 강화하기 위함이다. 하늘의 문은 이미 열렸다. “하늘의 문을 여소서”라고 불신앙적인 기도를 할 필요가 없다. 다만, 우리의 마음은 훈련받아야 한다. 우리의 심령은 예민하게 갈고 닦아져야 한다. 신앙 생활의 유익은 여기에 있는 것이다.

다시 예전의 열심으로 돌아갈 이유가 생겼다. 그러나 그 이유는 전혀 달라졌다. 내 행위의 어떤 것도 하나님을 감동시켜 드릴 수는 없지만, 그런 훈련과 노력으로 내 심령의 주파수를 하나님과 맞출 수는 있다. 성경을 읽음으로 진리를 더 잘 알 수 있다. 기도의 제목은, 더 이상 “이걸 해주세요, 저걸 해주세요 주님!!!”이 아니라, “내 삶에 주신 복으로 인해 감사합니다. 이것을 믿을 수 있도록 마음을 권고해 주시고, 진리를 알 수 있도록 나를 깨우쳐 주세요”로 바뀌어야 마땅하다.

기억에 남는 구절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는 말이 틀렸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정확히 말하자면 은혜만으로 구원받는 것은 아니란 뜻입니다. 이것을 반드시 이해하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우리르 위해 엄청난 일을 하셨디만 이렇게 하나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것들을 받아 누리려면 우리 쪽에서도 긍정적인 반응을 해야 합니다. 성경은 이것을 ‘믿음’이라고 부릅니다. 이렇듯 은혜와 믿음이 적절하게 합해져야 합니다. (11)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말이다. 이런 말을 하면 알미니안주의자라고 오해받을지도 모른다. 물론, 성경은 믿음도 선물로 주셨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렇다 해서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시지 않을 사람까지 미리 정하셨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교리이다. 우리 쪽에서도 의지적인 반응을 일으켜야 구원의 은혜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은혜만을 (문맥상 ‘주권’이 적절함) 강조하며 “모든 게 하나님께 달렸어”라고 한다면, 그것이 당신을 영적으로 죽게 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믿음만을 강조하며 “믿어야 합니다. 행해야 합니다”라고 주장한다면 그것도 당신을 영적으로 죽게 합니다. 참된 성경적 믿음은 하나님께서 이미 은혜로 이루신 것들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20)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아야 한다. 오직 주권을 강조하며 재앙도 하나님의 뜻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질병도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면서 질병을 고치기 위해 약을 먹는 모순된 태도는 얼마나 안타까운 것인가.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이미 다 이루어 놓으셨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채 “보좌를 흔들기 위해” 노력과 행위로 하나님을 설득하려는 행위도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 씨름을 해서라도 그분이 일하시도록 만들려고 하고 있다면, 그러한 태도가 오히려 당신의 삶에 좌절감만 가져다 줄 것입니다. 그것은 말씀과 전혀 일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88)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보혈의 은혜로 모든 것을 이루셨기 때문에. 성경은 우리가 “치유받았다”라고 말하지, “치유받을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이미 성령을 부으셨지, 아직 안 오신 것이 아니다. 하늘 문이 2000년 전부터 열려 있었는데도, 어떻게든 하나님을 설득해서 은혜를 더 부으시게 만들려는 시도는, 이미 하나님의 은혜가 충분히 공급되고 있음을 믿지 않는다는 뜻이나 마찬가지.

일단 하나님께서 은혜로 모든 것을 이미 이루어 놓으셨다는 것을 이해하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으셨다는 잘못된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103)

모든 것이 이미 공급되었지만 그렇다고 자동적으로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신 일에 대해 합당한 믿음으로 반응해야 합니다. 어떤 문제를 직면할 때마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안달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이미 하신 일을 신뢰하는 법을 배우셔야 합니다. (109)

이미 주셨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 주세요 주세요”하면서 애걸복걸하지 않아야 할 이유이다. 하지만 은혜의 유익을 누리기 위해서는 믿음으로 반응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이것이, ‘모든 것을 주셨음에도’ 우리가 신앙생활에 힘써야 할 이유이다.

계속 뭔가 일을 해달라고 간구하기보다 하나님께서 이미 하신 일에 대해 감사한다면 훨씬 더 효과적으로 기도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도 믿음을 필요로 하는 일입니다. (158)

물리적인 세계에 나타났는지의 여부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영의 세계에 주신 것에 대해 믿음으로 반응할 수 있느냐가, 그것을 실재로 나타나게 할 수 있는지의 여부를 결정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는 “아직 안 주신 인색한 하나님께 달라고 애쓰는”기도가 아니라, “이미 풍성하게 부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는”기도가 되어야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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